3월이면 끝나길 원했던 코로나 위기가 아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유럽의 확산세가 가파르더니, 이제는 미국이 위태로워 보인다. 평소 자랑하기 좋아하던 트럼프 대통령이 엄청난 공포에 휩싸인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이 작은 바이러스가 이처럼 엄청난 재앙이 될지 누가 알았을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문제, 즉 '이미와 아직의 문제'를 다룬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두 사람, 즉 바울과 아볼로의 본을 들어 그의 논지를 제시한다. 그것은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과 아볼로가 본을 보였으니, 기록된 말씀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다(6절). 바울은 이어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7상절) 그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만약 고린도 성도 중 누군가를 구별하셨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자랑할 수 없다는 논지다. 그들에게 어떤 은사나 잘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는 말이다(7하절).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너무 앞서 나갔다. 그들은 "이미" 배부르고, "이미" 풍성하며, 바울과 아볼로 없이도 "이미" 왕이 되었다(8상절). 고린도 성도들이 왕 노릇하는 것은 사도들도 바라는 바다(8하절). 하지만 이어지는 구절을 보게 되면,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 바울의 논지다. 하나님은 사도들을 원형 경기장의 검투사처럼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9절). 사도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하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다(10절).
사도들은 "바로 이 시각까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친히 손으로 수고하여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하지만 축복하고, 박해를 받지만 인내하고, 비방을 받으나 권면했다(11-13상절). 이처럼 사도들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은 존재가 되었다(13하절).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자랑하기 좋아하는 인간의 연약함과 오만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정치 현장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목회 현장이나 사역 현장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현상이다. 오늘 본문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몇 가지 교훈을 제공해 준다.
첫째, 그리스도인끼리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코로나 위기를 돌파하면서 가뜩이나 분열된 한국교회는 또 다시 각자의 소견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뉜 것을 본다. 다들 나름의 논리가 있겠으나, 지금은 교만한 마음을 품어 서로 다툴 때가 아니라 겸손한 마음을 품어 서로 존중하고 이 위기를 함께 극복해 나갈 때다.
둘째, 우리는 '이미-그리스도인'으로서 교만해서는 안 되고, '아직-그리스도인'으로서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구속사와 우리 인생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다양한 스펙트럼과 수많은 회색지대가 존재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균형감각이다. 아직은 설레발을 치거나 자랑질을 할 때가 아니다. 겸비하여 자신의 자리에게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할 때다.
셋째, 사역자로서 또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고난과 박해를 당할 수 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모욕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핍박을 당할 때 인내하며, 비난을 받을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적절히 대답해야 한다. 내적으로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고, 외적으로는 잃어버린 영혼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영국 시인 T. S. 엘리오트가 <황무지>라는 시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잔인한 사월이 시작되었다. 35년 전 재수할 때 그 시를 처음 접했었는데, 그때와 지금은 비교의 차원이 다르다. 그때는 개인의 문제였지만, 지금은 전 세계적인 재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재앙이 속히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73억 인류가 동일하겠지만, 아직 우리는 더 겸비해야 한다. 오직 주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