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시는 해안에 가까운 무역도시이고 시리아와 소아시아에 이르는 아시아 중부지역에 이르고 주전 67년에 로마의 폼페이장군에 위해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로버트 피키릴리는 다소가 중요한 도시로 간주되는 이유를 4가지로 피력하고 있다.
1, 도시의 규모가 크다
바울이 살았던 당시의 다소는 50만의 인구를 자랑하며 약90평방마일의 면적을 가진 약간의 복잡한 도시였다.
2, 이 도시의 무역이다.
다소는 지중해의 분주히 움직이고 떠들썩한 상업도시중 가장 분주하고 경쟁적인 중심지들 중 하나였다. 천연적으로 보호를 잘 받는 항구가 있고 키두누스 강이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12마일의 강이 있다. 다소인들은 무역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길리기아의 관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3, 정치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다소지역은 위치가 요새로서 군사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바울이 태어났을 때 다소는 거의 1천년 동안 그러한 중심지가 되어 왔다. 앗수르,바벨론, 그리고 메대 파사제국들이 초기에 다소는 소아시아의 중심도시였다.
4, 대학도시였다.
다소는 그 고장사람들이 일반학문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조차 능가하는 대학도시였다. 바울의 가족은 바울이 태어나기전 상당히 긴 기간동안에 다소에서 거주하였음이 행23:26-27에서 유대인의 아버지 때부터 다소의 심니권과 로마의 시민임을 글라우디오 루시아와 총독인 벨릭스에게 주장하였다.
2) 바울의 족보
빌3:4-5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 하며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도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이스라엘족속이요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1,베냐민지파 사람이다.(롬11:1)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땅을 분배할 때에 유다지파의 북쪽에 위치가 있었다. 통일왕국이 분열되었을때에 베냐민 지파사람들은 자연히 지파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히브리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베냐민 사람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이다.
이름또한 사울이라는 이름은 유대식이름인데 사도행전에서 바울로 바뀌었다.
2, 히브리인이다.
히브리인이란 이스라엘인들을 깔보는, 얕보는 의미에서 나오는 단어이다.
사도행전에서 히브리파 사람들(히브리어를 사용하는사람들), 헬라파 사람들(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3,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다.
이 말은 행22:3에서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
행23:6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바리사이는 신약 시대에 팔레스티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유다교 분파였다. 당시 유다교 분파로는 바리사이 외에도 사두가이, 에세네파, 열혈당 등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바리사이들이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어원으로 보면 ‘분리된 사람, 구분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데 있어서 일반 대중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를 간직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며, 율법을 통해 거룩함에 이를 수 있다는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 점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자기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존재들이라 하여 자기들을 스스로 바리사이라고 칭하지 않았을까 하는 어원에 관한 가정적인 추측이 있어 왔다. 바리사이에 관해 알 수 있는 자료들로는 신약 성경과 유다교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셉의 저서들과 랍비문학 작품들이 있다.
또한 바울은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언어의 능통한 사람)
B, 바울의 회심과 사도직
1, 바울의 학문적 배경
바울 시대에 예루살렘에는 두 학교가 있었는데 1)라만 힐렐의 학교 2)라만 샴마이 학교가 있었는데 바울은 가마리엘의 문화에서 공부한 것으로 말하는 것을 볼때에 힐레하교에 다녔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바울은 능력있고, 실력있는 랍비이다.
바을은 추측하건데 집에서는 아람어를 썻고(행21:40, 22:2,26:14), 다소의 거리에서는 헬라어를 썻을 것이다. 그리고 라틴어를 잘 사용하였을 것이다.
바울하면 어떻게 표현하고 싶습니까? 열성
갈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회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의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2, 사도바울이 기독교를 심하게 핍박했던 이유는 무었일까요?
기독교를 율법의 배교자(배신자)로 본 것이다.
개와 고양이 견원지간
C, 갈라디아에 담긴 사상
바울로는 본 편지를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 (갈 1:2)"에 쓴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의 위치는 알려져있지 않다. 소수의 학자들은 이 "갈라디아"라는 명칭이 북부소아시아에 살던켈트족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 대부분은 중부 소아시아에 있던 로마 속주로, 기원전 270년경에 켈트족들이 이민해 바울로의 시대까지 골족의 문화와 언어를 유지하고 있었던 곳이라는데 의견을 모은다.사도행전은 바울로가프리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행 16:6, 18:23) 두루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프리기아는 갈라디아의 서쪽에 접한 지역을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은 갈라티아 교회들(비시디아 안티오키아,이고니온,리스트라,데르베)을 세운 사람이 바울로이며, 행 16:6, 갈 1:6; 4:13; 4:19를 이에 대한 근거구절로 제시한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이방인 개종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갈 4:8). 바울로가 갈라디아 교회를 떠난 후 교회의 사람들은 "다른 복음"을 따라가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모세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율법주의를 의미한다(갈 1:1-9). 갈라디아 신자들은 바울로가 이전에 그들에게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들에 수용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묘사되고, 바울로는 그가 목격한 이러한 모습에 대응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9]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신21:23)
기독교가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은 이유 신성모독이라 참람하다
D, 바울의 선교활동과 서신들
바울은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회심이후 바뀌게 되었다.
유대교들이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고, 같은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게 된다.
이후 바울로는예루살렘을 방문하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전적을 생각해 바울로를 믿지 못하여 만나기를 꺼렸지만,바르나바(개역성경의 바나바)가 중재하여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다고 한다. 그러고서 바르나바와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곳의 교회에서 활동한 듯하다.
그러다가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바르나바와 바울로를 선택하여선교사로 파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려고 본격적으로 길을 떠나게 된다. 유대식 이름 사울이 더 이상 쓰이지 않고 헬라어식 이름 바울로만 기록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초기에는 키프로스와 소아시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우선 키프로스의 수도인 파포스(바보)에 있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예수를 전했다. 이 때 총독의 앞에서 자신을 망신 주려는 마술사를 저주하여 눈을 멀게 한 일화도 존재한다. 이 후 베르게(버가)에 이르렀을 때 마르코가 여로를 버티지 못하고 하차하는 일이 발생한다.[32]
어쨌든 타우르스 산을 건너 피시디아 안티오키아로 도착한 바울로는 회당에서 지속적으로 설교를 하면서 신도들을 늘려나간다. 이에 유대인들은 귀족들과 세력가들을 충동질해 바울로에게 축객령을 내리려고 했...는데,